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이만한 충격을 받은 것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슬픔을 보여주고 그 감정에 동화되어 우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전하는 문장과 표현으로 인해 눈물을 흘린 것 또한 정말 오랜만입니다.
세계와 세계가 충돌하는 이야기
다소 거창한 표현일수도 있지만, 이 작품이 전하는 충돌들을 포괄하여 표현하기에는 '세계'만큼 큰 단위가 필요했습니다.
보통 이야기는 하나의 세계 안에서 정해집니다. 선과 악이 있거나,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거나 하여 등장인물은 그 세계가 정해준 틀 안에서 역할을 맡게 됩니다. 특이한 사상을 가진 인물도 등장할 수 있지만 보통은 비틀어진 사고로 인해 만들어진 모순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느끼는 것들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다릅니다. 주인공이 대표하는 사상과 그 대적자(최종 보스라고 하겠습니다.)가 대표하는 사상은 둘 다 대번에 판단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는 둘 다 기이하고 뒤틀린 모습일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의 주류 철학에 기반합니다.(실제 철학자를 중점으로 보는 현대 철학의 흐름 같은 것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사회 전반에 깔리는 사상을 주도하는 가치관이 대충 어떠한 모습인지를 개인적으로 판단해서 그 기준으로 말씀드립니다.) 단지 상징을 비틀어놨을 뿐입니다. 주인공은 과학 사회를 상징합니다. 4차 산업혁명 이후로 진짜 '신'의 존재를 믿는 신앙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대신 우리는 과학을 믿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현대 사회를 과학이 신앙이 된 시대라고 칭합니다. 주인공은 마술에 대해서 탐구합니다. 마술이 아닌 것도 마술의 체계를 가지고 분석합니다. 최종 보스 기탄은 인물로서의 '신'을 숭배하는 신앙을 상징합니다. 중세 사상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기탄은 기존의 신을 숭배하는 그 형식에 의문을 가지고 그 허점을 파고듭니다. 중세 신앙의 문법으로 세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합니다. 그리하여 기탄은 새로운 신앙 세계의 문법을 정의합니다. 하지만 주인공 로이드는 마술 이론에 기반한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리고 현재 신이 없는 우리 사회가 내놓은 대답을 기탄에게 전달해 줍니다. "그냥 네가 좋아하는 것을 해라.", "즐기는 것이 전부다."와 같은 요즘의 격언을요. 이것들은 분명히 과학 신앙 사회 위에서 우리가 찾아낸 여러가지 답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그냥 논리 대결에 불과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닙니다. 주인공과 최종 보스의 세상은 각각 스스로 완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답이 오답에게 훈계하는 모양새가 아니라, 하나의 논리가 다른 세상을 만나면서 스스로 허물어지는 구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표현하기 위함
캐릭터 디자인과 스토리 등 속 없이 재미를 위해서만 만들어진 요소는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여기서 무언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특정한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가끔은 이것이 과도해서 이야기 자체의 개연성이나 흐름보다 표현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는 복수의 플롯에서 절묘하게 겹쳐 필요한 진행임이 보입니다. 하지만 오로지 이야기 진행만 놓고 보면 뜬금없게 느껴집니다.
연출기법 콜라주
다양한, 정말 다양한 표현법을 씁니다. 보통은 표현의 결이 장르나 미디어 형태나 어떤 톤이 정해져 있어서 그걸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정말 뜬금없지만 나름 일리는 있는 표현법들이 마구 등장합니다. 만약 작가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모습이 로이드와 같다면, 사회 통념에 얽메이지 않고 순수한 논리로 판단하는 모습이라면, 그 추구함이 느껴지는 방식입니다. 저는 그 이상에 동의하는 편이기 때문에 좋게 봤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수선하고 장난 같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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